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진-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1968년 초 [[공비]]가 청와대를 기습한 [[1.21 사태]]로부터, [[푸에블로호 피랍사건]]에 이어 [[통일혁명당 사건]]을 거쳐 1968년 말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로 이어지는 일련의 북한의 대남 적대 행위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히 다지게 하였다. 즉 '''반공이 국시가 되는 것'''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강하게 끼쳤다. 굳이 순기능과 역기능을 나누어 이야기해본다면, 순기능으로서는 이렇게 당하게 되어 대간첩작전 체계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반면, 역기능으로서는 소위 [[빨갱이]]에 관한 증오와 공포([[레드 컴플렉스]] 항목 참조)가 사회 일반으로 퍼지게 되었다. 이 시점은 6.25 휴전으로부터 15년이 되는 해로 구 일본제국의 중화학, 발전설비 등 군수산업유산을 고스란히[* 날려먹은건 소련과 동구권의 원조로 어찌어찌 복구했다. 아예 복구할 것도 없었던 남한보다는 몇 배 나은 환경이었다.] 물려받은 북한의 경제력을 앞지르던 시기였다. 이후 한국 정부는 제3세계 외교전을 수행하여 북한을 고립시키는데에도 노력을 가하기 시작했다. 또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초래하고 유엔의 평화통일 노력을 방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엔총회에 특별 보고를 하기로 결정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